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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허씨 22세 /  조선시대
허후(厚)

파조명허후(厚)

행직:  장악원정(掌樂院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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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설공 후손들의 시제 봉행 모습 (논산문중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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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설공 허후를 배향했던 도천서원 (현재 터만 남아 있다.)

관설공파(觀雪公派) 약사

관설공파는 송호공 허강(橿)의 둘째 아들 동주공(桐洲公) 허량(亮)의 아드님인 관설공(觀雪公) 허후(厚)를 파조로 모시는 문중입니다. 관설공은 미수공과 같이 서울 창선방(彰善坊)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는데, 태어난지 3개월도 안되어 아버지인 성균진사 허량(亮)께서 27세로 돌아가시니 숙부인 포천공 허교(喬: 미수공의 아버지)를 친 아버지같이 섬기며 그 밑에서 자랐습니다. 성균진사(成均進士)란 진사 시험에 합격한 진사 중에 성균관에서 공부하며 대과(大科)를 준비하던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관설공은 15대 임금 광해군 10(1618)년, 광해군의 폭정으로 서울이 시끄러워지자 난리를 피해 원주로 이주하였다고 행장(行狀)은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광해군 10년 8월에 21세 교산(蛟山) 허균(筠) 공과 그의 동료들이 역모로 몰려 처형당하는 일이 벌어지니 가문(家門) 차원의 보신책(保身策)으로 서울을 떠나 강원도 원주로 이주했다고 생각됩니다.

관설공은 처음 원주 울업에 자리를 잡았으나 이후 거처를 치악산 서쪽의 비둔계(肥遯溪), 원주 동쪽의 주촌(舟村), 그리고 제17대 임금 효종 2(1651)년 겨울, 단구(丹丘) 남쪽의 관설촌(觀雪村)으로 세 차례나 옮긴 후 이곳 관설촌에서 호를 관설(觀雪)로 삼고 12년을 거처하셨다고 전합니다. 그 당시 짚고 다니시던 지팡이를 땅에 꽂았는데 그 지팡이에서 싹이 나와 세월과 함께 고목으로 자랐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 초 어느 해 원주를 강타한 강한 태풍으로 그 고목이 뿌리채 뽑혀나가자 이를 애석하게 여기던 원주시와 마을 주민들이 1994년 그 고목이 서 있던 자리에 『관설 허후선생 식장고수유지(觀雪許厚先生 植杖古樹遺趾)』라는 비를 세우고, 비 옆에 계수목으로 전나무 두 그루를 심었고 그 나무 역시 지금 거목으로 자라고 있습니다.

관설공의 후손들은 하계로 내려 오면서 강원도 원주를 비롯하여 경기도 여주와 충청남도 논산 지방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자손들이 많이 번창하지 못해 후손들의 수가 적습니다. 관설공과 관설공의 부친 동주공 허량(亮)의 묘소는 은거당 묘역이 소재한 경기도 연천군 강서리와 인접해 있는 노동리(蘆洞里)에 계십니다.


모토: 관설공파종회 모토

  • 회장

    허욱(煜)
    연락처: -

  • 총무

    허욱(煜)
    연락처: -

  • 집성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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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상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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