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중경(重卿)이며 증조는 동애공 허자(磁)이니 중종, 인종, 명종을 섬겨 관직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조부는 허강(橿)으로서 선행이 알려져 전함사별제(典艦司別提)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허강(橿)의 둘째 아들 허량(亮)으로 제14대 임금인 선조 21(1588)년에 진사가 되었으나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선생은 비록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였으나 소싯적부터 공부를 할 줄 알아서 처음에 사복시정(司僕寺正) 권용중(權用中)에게 학문을 배웠다. 권용중은 어머니 권씨 부인의 숙부(叔父)인데 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의 문인이다. 이중호(李仲虎)는 제12대 임금인 인종과 제13대 임금인 명종 때에 이름난 학자다. 공(公)은 학문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학문이 성취된 뒤, 덕신공자[(德信公子: 세조의
현손인 덕신정(德信正) 이난수(李鸞壽)]에게 종유(從遊: 학식이나 덕행이 높은 사람을 좇아 함께 지냄)하여 《주역(周易)》을 배우고, 《대학(大學)》을 강독(講讀: 글을 읽고 그 뜻을 밝힘)하여 《대학구결(大學口訣)》과 《경전요해(經傳要解)》를 완성하였다.
광해군 때에 세상을 피하여 강원도 원주로 갔다가 영남으로 내려가서 한강(寒岡) 정구(鄭逑), 우곡(愚伏) 정경세(鄭經世) 두 현자(賢者)를 만나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삼대(三代)의 기상(氣像)이 이 두 어른에게 있으니 나의 학문은 옛 사람에게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형편없는 옷을 입고, 형편없는 음식을 먹으며 사람들과 더불어 지내면서도 이를 부끄러워 하지 않았고 평소의 거처(居處)에 반드시 공경하며 말하기를
“움직이고 말하고 행동하는 법칙에서 천지가 자리 잡고 만물이 길러지는 극치를 알 수 있다” 하였다.
제16대 임금 인조 1(1623)년에 문충공(文忠公) 이원익(李元翼)이 공을 행의(行誼: 품행과 도의, 행실이 올바름)로 천거하니 임금이 불러 내시학(內侍學)의 교관(敎官)을 제수했다. 내시학교관이란 조선 시대 덕행과 도예(陶藝)가 있는 선비를 택하여 동궁에서 서연(書筵: 왕세자에게 경서를 강론하던 자리)하는 직책이다. 인조 5(1627)년 정묘년 호란(정묘호란: 만주에 본거를 둔 후금의 침입) 때 임금께서 도성을 떠나 강화도로 피란을 하게되자 전국의 군사들을 소집하여 임금을 호위하였는데 공이 의병장 김창일(金昌一)과 더불어 일을 의논하니 김(金) 공이 일어나 경탄하여 말하기를 “훌륭하다. 일세(一世)의 현재(賢才: 남보다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라 이를만 하다” 하였다. 적이
물러가고 여러 의병들에게 포상을 내렸는데 공은 제용감직장(濟用監直長)에 제수 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제용감은 왕실에 필요한 의복이나 식품 등을 관장하는 관서이며 직장은 종7품이다.
이인거(李仁居)라 하는 자가 몸소 농사를 짓고 살면서 고상한 체하고 큰소리치기를 좋아했는데, 공이 말하기를 “풍속을 해치고 의리를 무너뜨릴 자는 반드시 이 사람이다.” 하였는데 후에 그 사람이 대역죄로 죽음을 당하게 되었을 때, 그가 공의 이름을 거론하매 공도 붙잡혀 가자 어머니 권씨 부인이 운명했다. 임금이 느낀 바 있고 아무 일도 없었음을 알게되어 공을 석방하였다.
처음에 권씨 부인을 경기도 광주(廣州) 대강(大江: 지금의 한강) 가에 장사지냈는데 공(公)이 여막살이를 하며 나물밥에 물만 마시면서 3년 동안 매일 아침 저녁으로 산소를 바라보고 슬피우니 강가의 나무들이 마를 정도였다. 대상(大祥: 3년상)을 마친 후 이영언(李英彦)과 더불어 《상제변례(喪祭變禮)》를 강론하였다.
인조 11(1633)년에는 사도시주부(司導寺主簿)를 거쳐 지평현감(砥平縣監)으로 나가니 그곳에 기세를 부리는 내노(內奴: 궁중에 속하여 잡역 따위의 일을 하는 노비)가 있어 백성에게 해를 끼친지 10년이 되는데도 수령들이 감히 꾸짖지 못했다. 공이 그가 금령을 어긴 10여 가지 일을 들추어 내어 법으로써 단죄하니 민심이 크게 기뻐하였다. 사도시는 궁중의 쌀과 곡식 및 장(醬) 등의 물건을 담당하던 관청이며 주부는 종6품 관직이다.
그러나 공(公)이 사람을 함부로 죽였다는 것으로 논죄를 받아 겨울에서 여름까지 감옥에 갇혀있게 되자, 공의 품성과 행적을 잘 아는 고을 사람들이 대궐 앞에 나와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그해에 때마침 가뭄이 들었는데 그것이 공의 억울한 옥살이 때문이라고 하여 공이 석방될 수 있었다. 공이 원주로 돌아와 작은 집을 하나 지었는데 소암(素庵)이라 이름 했다. 일찍이 성재(惺齋)와 돈계(遯溪)라는 호를 썼는데, 돈계는 치악산(雉岳山) 아래에 있다.
인조 15(1637)년에 태묘령(太廟令)(56)이 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얼마 후에 의성현령(義城縣令)에 제수되었는데 의성은 큰 고을이라 다스리기가 어려운 고장으로 알려졌다. 공이 옛일을 묻고 폐지된 정책들을 복원하며 조약(條約: 법률이나 규정 따
위의 항목을 맺은 약속)을 엄중하게하고, 호기부리고 권력 쓰는 것을 금하는 한편 법을 어기고 명령에 순종치 않는 자들을 법으로 다스리니 권세 있는 명문 거족들 대부분이 공을 좋아 하지 않았다. 4년 만에 그만두고 창락(昌樂)에 일시 기거하였다.
인조 21(1643)년에 세자시강원익위(翊衛)로서 북경으로 떠나는 세자를 전송하였고 세자가 돌아온 뒤에 위솔(衛率)이 되었다. 뒤에 형조와 호조의 좌랑이 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인조 26(1648)년에 호조정랑(戶曹正郞)에서 외직으로 은산현감(恩山縣監)으로 나가니 은산은 당시 권세가의 고향이라 여러 고을들이 다투어 자신을 낮추고 그 권세가를 섬겼다. 이에 예절 차리는 것이 거만하다며 공을 꾸짖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공손하기만하고 예가 없는 것을 옛 사람이 수치스럽게 여겼다. 나는 예를 행하고자 하는데 도리어 거만하다 하니 또한 이상하지 않은가?” 하고 1년 만에 그만 두었다.
제17대 임금 효종 2(1651)년에 형조좌랑이 되고 인조의 담사(禫祀)를 맞아 입궐하여 사은숙배(예전에,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며 공손하고 경건하게 절을 올리는 것)하고 즉시 돌아왔다. 이해 겨울에 원주의 관설촌(觀雪村)으로 이사하여 관설을 호(號)로 삼았다 이후 여러 차례 종묘서령(宗廟署令), 태복소정(太僕少正)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3년 후인 효종 5(1654)년에 선공감첨정(繕工監僉正)이 되고 또 얼마 후에 사헌부 지평이 되었으나 상소를 올려 사양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강직하고 방정한 사람으로 들은 지가 오래이나 조정에서 기용하지 않으니 내가 특별히 등용하는 것이다” 하였다. 가을에 사헌부 장령으로 승진하였으나 사양하고 돌아가자 어떤 이가 말하기를 “언책(言責: 언관의 책임)을 담당하여 말할 수 있음에도 말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니, 선생이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억지로 말하여
명예를 구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하였다.
효종 9(1658)년에 상례(相禮)를 재배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회양도호부사(淮陽都護府使)를 재배하였어도 나아가지 않았으며 여름에 다시 장령으로 복직되었으나 권세가의 미움을 받아 그만두었다. 겨울에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이듬해는 상방정(尙方正)이 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는데 겨울에 효종(孝宗) 상(喪)을 당하여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제수되자 즉시 나아가 사
례(謝禮)하고 얼마 후에 병으로 사직하였다. 상방은 궁중에서 소요되는 재화, 금은보화 등의 물품을 담당하는 관청이다. 상의원의 별칭이며 정(正)은 정3품 관직이다. 장악원은 조선 시대 궁중에서 연주하는 음악과 무용에 관한 일을 담당한 관청이며 정(正)은 정3품 당하관이다.
제18대 임금 현종 즉위년(1660) 12월에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는데 다음달 종제(從弟) 영월군수 허서(舒)가 숨지자 지나친 슬픔이 공(公)의 병을 도지게 해 2월 1일에 별세하니 향년 74세였다. 전날 저녁에 시자(侍者: 귀한 사람을 모시고 시중드는 사람)로 하여금 머리를 빗게하고 옷을 갈아입었는데 아침이 되자 돌아가셨다. 문인(門人) 이명시(李命蓍)가 상례(喪禮)를 주관하였고 수업을 받은 문인들 또한 수질(首絰: 상복을 입을 때에 머리에 두르는 둥근 테. 짚에 삼 껍질을 감아 만듦)을 두르고 곡(哭) 하였다. 그해 1월 을유(乙酉)일에 경기도 마전군 북쪽 20리 양주조씨(楊州趙氏) 숙인묘(淑人墓)와 같은 언덕에 장사지내고 10년 후 현종 11(1670)년에 같은 고을의 분
석산(分石山) 동록(東麓: 동쪽 기슭)에 이장하였는데 숙인(淑人)의 묘도 같이 옮겼다.
공(公)은 이미 나아가는 바가 크고 그 지킨 바가 간략하니 학문도 공경으로 시작하지 않음이 없으며 법도가 엄절하여, 아는 것은 반드시 행하고, 행한 것은 반드시 결과를 맺었다. 일상생활의 하찮은 것으로부터 백성을 사랑하고 사물을 이롭게하는 큰 것에까지 다 그러했다. 또한, 전부(田賦), 사율(師律), 형서(刑書), 천문(天文), 지리(地理), 음양(陰陽)의 운화(運化: 운행과 변화)에 이르기까지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으니, 동요되지도 유혹되지도 않았으며 비록 난세에 살았지만 사태의 기미를 먼저 내다보아 환해(患害: 재난으로 생기는 피해)가 미치지 아니하였다.
공이 항상 말하기를 “정치는 반드시 명(命)한 것이 행해지고 금(禁)한 것이 그쳐진 뒤에야 다스림의 본체를 볼 수 있다. 또한 아래 사람을 거느리는 데는 너무 까다롭게 밝히지 말며, 일에 임하여는 작은 이익 때문에 큰 의(義)를 저버리지 말며, 사람을 쓰는 데에는 그 단점으로 장점을 가리지 말라. 벼슬을 함에는 오로지 큰 법도를 따를지니 한 시대의 다스림은 각각 한 시대의 제도가 있는 법인데 하물며 시왕(時王: 당시의 임금)의 제도를 어찌 폐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공이 재주가 많고 박학하므로 평소의 의칙(儀則)과 품절(品節)의 상세한 데까지 미루어 나갔으니, 그 도(道)가 완성되고 덕(德)이 완전하여 한 세상의 이름난 큰 선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공의 그 뜻 깊은 말과 뛰어난 행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붕당(朋儻)이 생긴 후로 세상의 도의가 크게 무너지니 매번 학문하는 자들을 대할 때면 세상의 학문하는 폐단을 극단적으로 말하곤 하였는데, 그 핵심은 “말과
행동이 개인의 명예를 구하는데 있을 뿐 바르고 공정한 길을 추구하지 않고 있다. 때묻지 않은 사람의 마음으로 힘써 인심을 맑게하고 세상의 교훈을 바로 세워야하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당시 공이 낮은 벼슬의 관료에 머물고 있으니 재상이 추천하는 등, 공을 이끌려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계속해서 주어지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으려 했다.
공(公)의 저서에는 성명(性命: 인성과 천명)과 천인(天人: 하늘과 사람)의 근본, 예악(禮樂: 예법과 음악)과 문물의 법칙, 인물과 고금(예전과 지금)의 치란(治亂: 잘 다스려진 세상과 어지러운 세상)과 흥괴(興壞: 흥하고 무너짐), 사방의 토물(土物: 토산물)과 백산(百産:
생산물), 요얼(妖孥: 재앙의 징조)과 재이(災異: 재앙이 되는 괴이한 일) 및 백가(百家)의 중기(衆技: 수많은 기술과 예술), 백성들이 모여 사는 곳의 풍요(風謠: 풍속을 읊은 노래)와 속상(俗尙: 그 시대의 풍속상 숭상하여 좋아하는 것)에 관한 것으로, 무려 수만 마디의 말이 담겨있었는데 지난해에 집에 불이 나서 서책을 모두 꺼내지 못하였다.
뒤에 공의 제자 이명시(李命蓍)와 종제인 미수(眉叟) 허목(穆)이 흩어진 유문을 모아 3권1책의 《돈계유고(遯溪遺稿)》를 펴냈는데 답문(答問) 28편, 상소문(上疏文) 3편, 서(書) 20편, 제문 4편, 시 25수,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9대 임금 숙종 1(1693)년에 강원도 원주 지방 유림들이 공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을 세우고 위패를 모셨는데 그 해에 『도천서원(陶川書院)』으로 사액(賜額)되었으나 제23대 임금 고종 때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毀撤: 헐어서 없애버림)된 뒤 복원되지 못하고 현재 강원도 원주시 문막면 건등리 원평마을에 서원터만 남아있다. 마을 사람들은 그곳을 서운대라고 부르는데 서운대는 서원대(書院垈)가 변화한 것이다.
선생의 첫 번째 부인은 전주이씨(全州李氏)로 1녀(女)를 낳은 뒤 일찍 죽고, 두 번째 부인 양주조씨(楊州趙氏)가 2남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허황(羽 黃)과 허익(翼)이다. 허황(羽 黃)과 막내딸은 일찍 죽었다. 사위는 신환(申㬊)과 송유징(宋孺徵)이며 후배(後配)
의 아들은 허승(𦐒)이고 사위는 홍상형(洪尙亨)이며 딸 하나는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관설공 허후(厚) 묘명 - 허목(穆)
곧으면서도 엄격하고 直而嚴
태연하면서도 겸손하셨네 泰而謙
삼백 가지 위의(威儀)와 威儀之則
삼천 가지 예의(禮儀)① 갖추시고 三百三千
명철한 지조로 明哲之操
흔들리지 않고 말하지 않으셨으니 不動不言
의혹을 제거할 만하였고 可以去惑
풍속을 교화할 만하였네 可以化俗
① 삼백
…
예의: 중용(中庸)에서 자사가 한 말인데, 주자는 주에서 “위의는 경례(經禮)이고,
예의는 곡례(曲禮)이다.” 하였다. 경례는 관혼상제(冠婚喪祭) 같은 큰 예의 큰 절목이고,
곡례는 경례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행해지는 승강(昇降)이나 진퇴(進退) 같은 작은 절목으로
지켜야 할 각기 다른 수많은 예의를 뜻한다.
관설공의 시(詩) 중 일부를 소개한다
이사하다 〔移居〕
깊은 마을에 다시 새로운 터전 정하니 深村聊復定新居
곳에 따라 안배함에 흥이 절로 넘치노라 隨處安排興有餘
생활을 도모함이 아주 졸렬하다고 말하지 마오 莫道謀生全短拙
풍월은 산에 가득하고 책은 책상에 가득하다오 滿山風月滿床書
국화를 빌리다 〔借菊〕
봄 하늘 어느 물건인들 꽃답지 않으랴마는 春天何物不芬芳
오직 동쪽 울타리에 늦게 피는 향기 사랑하네 只愛東籬晚節香
유명한 동산에 국화가 많단 말 들었으니 聞說名園栽養富
나에게 몇 그루의 노란 꽃 나누어 주구려 可能分我數叢黃
시비음 〔是非吟〕 - 1
세상 사람 중에 그 누가 옳고 그 누가 그르단 말인가 世人誰是又誰非
사람들 옳다하고 그르다 하여 시비를 다투누나 人是人非閙是非
시비는 사람에게 있어 사람이 관여하지 않지만 是非在人人不與
만약 시비에 종사한다면 옳은 것도 완전히 그르다오 若事是非是全非
시비음 〔是非吟〕 - 2
옳은 것도 꼭 옳은 것 아니어서 그를 수도 있으니 是非眞是是還非
굳이 세파 따라 억지로 시비롤 따질 것이 없다오 不必隨波強是非
도리어 시비를 잊고, 높은 안목으로 보아야만 却忘是非高着眼
옳은 것, 옳다하고 그른 것, 그르다 할 수 있네 方能是是又非非
정심단시를 지어 사람에게 보여주다 〔定心丹詩示人〕
한 알의 단약(丹藥)이 이루어져 온갖 병 고치니 一粒丹成百疾醫
삼신산(三神山) 어느 곳에 영지(靈芝)를 찾을 것인가 三山何處覓靈芝
그대여 부디 심상한 법이라고 말하지 마오 煩君莫道尋常法
이는 진실로 보통 사람이 성인(聖人)이 되는 기초라네 儘是凡夫作聖基
용문산에 오르다 〔登龍門山〕
진세(塵世)에 문서 뒤척이는 일 떨어버리고 塵埃擺脫簿書勞
홀로 만 길 높은 용문산(門龍山)에 오르노라 獨立龍門萬仞高
한가한 사람 인연이 있어 애오라지 방랑하고 物外有緣聊放曠
세상사에 얽매임 없으니 바로 영웅호걸일세 世間無累是雄豪
가을은 맑아 위 아래로 한 점의 가리움 없고 秋淸上下收纖翳
산에 서리 내리니 단청해 놓은 듯 곱구나 霜落岡巒發彩毫
머무르며 영랑(永郞)①과 함께 좋은 구경을 하니 留與永郞同勝償
시 읊으며 운오(雲璈)②에 화답함이 나쁘지 않으리라 不妨淸咏和雲璈
① 영랑: 신라 시대 국선(國仙)의 한 사람인데 여기서는 상대를 높여 칭함.
② 운오: 원나라 때의 악기 이름.
오리 이상국 원익에 대한 만사〔梧里李相國元翼輓〕
태평하던 당시에 일찍이 좋은 이름 날렸는데 時平當日夙播芳
말년의 어려운 때에 도가 더욱 창성하였네 晚遇艱屯道益昌
위태로운 나라를 진정하여 대의(大義)를 붙들고 坐鎭危邦扶大義
새로운 태양 떠 받들어 많은 곳에 비추었네 起擎新日照多方
황하는 지주(砥柱)①를 만나 분방한 파도를 거두고 河逢砥柱收奔放
소나무는 추운 겨울에도 눈과 서리 견딘다오 松到窮冬耐雪霜
세 조정에 한결같은 충절 부끄러움 없으니 一節三朝無愧怍
돌아가 우리 선왕께 떳떳이 말하리라 有辭歸對我先王
① 지주: 황하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돌산으로 지절(志節)이 뛰어남을 말함.
여헌 장선생 만 〔旅軒 張先生 挽〕
저는 일찍이 선생님을 모시면서 樞衣凾丈昔吾曾
말씀 한 마디라도 분명하게 마음에 간직했습니다 一語丁寧已服膺
원래 부족한 자신이 배움으로 성취하기는 어려우나 縱是昏頹難矯化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를 잊을 수 없습니다 未忘兢業在淵氷
이십년 동안 풍진세상을 살아왔고 卄年蹤跡風塵際
반평생을 편지로 소식을 보내면서 半世音容尺牘憑
교화를 남겨주신 곳에 累가 된 것이 부끄럽습니다, 愧忝武城餘化地
부족하지만 훌륭한 선생님의 행동을 본받으려 합니다 欲效高躅奈無能
글쓴이: 허원무
번역:
출처: 양천허씨대종회 60년사, 201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