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문보(文父) 또는 화보(和父)이고, 호는 미수(眉叟) 또는 태령노인(台嶺老人) 이다. 태어나면서 손 바닥에 글월 문(文)자와 발 바닥에 우물 정(井)자가 있었다고 하며 눈썹이 길어 눈을 덮었다 하여 호를 미수(眉叟)라고 했다.
공(公)은 포천현감(抱川縣監) 증 영의정(贈領議政)인 허교(喬)와 정랑(正郞)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따님과의 사이에 첫째 아들로 서울의 창선방(彰善坊)에서 태어났으며 부인은 영의정 오리 이원익(李元翼)의 손녀이다. 증조는 좌찬성 동애공(東厓公) 허자(磁)이고 증조모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증손녀이며 조부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그 학문과 덕망을 기린 송호처사(松湖處士) 허강(橿)이고 조모는 문량공(文良公) 강희맹(姜希孟)의 현손 사용(司勇) 강복(姜復)의 따님이다.
9세에 입학하여 교관(敎官: 동몽교관)에게 수학하였고 총산(蔥山) 정언옹(鄭彦옹) 선생에게서 《예기(禮記: 유교 경전 중 5경의 하나)》와 《단궁(檀弓)》을 배웠다. 23세에 아버지의 임지인 경상남도 거창으로 따라가 그곳의 모계(茅溪) 문위(文緯) 선생을 찾아 배우고 이어 종형인 관설공 허후(厚)와 함께 경상북도 성주의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을 찾아 사사(師事: 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받음)했다. 30세 때에 경기도 광주의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독서하면서 원근(遠近)의 많은 학자들과 종유(從遊: 학식이나 덕행이 높은 사람을 좇아 함께 지냄)하였고 글씨에도 전념해 공의 독특한 전서(篆書)를 완성하였다.
1626년 32세 때 제16대 임금 인조의 생모 계운궁 구씨(啓運宮具氏)의 복상(服喪: 상중에 상복을 입음) 문제와 관련해 유신(儒臣) 박지계(朴知誡)가 원종(인조의 아버지에 준 임금의 칭호)의 추숭론(追崇論)을 제창하자, “박지계는 임금의 뜻에 영합해 예(禮)를 혼란시킨다”고 동학의 재임(齋任: 유생대표)으로서 유벌(儒罰: 유생들이 정한 벌칙)로 박지계를 유생 명부에서 삭적하였다. 이에 인조는 공에게 정거(停擧: 일정기간 동안 과거를 못 보게 하던 벌)를 명하였다. 후일 정거가 풀렸지만 공은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자봉산에 은거해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36년 42세 때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영동(嶺東: 강원도 대관령 동쪽 지역)으로 피난한 뒤, 어머님이 계시던 경상남도 의령(宜寧)으로 내려가 사천, 창원, 칠원 등지에서 10여 년간을 우거(寓居: 임시로 몸을 부쳐 삶)하면서 강론과 저술을 게을리하지 않는 한편 지리산, 남해안을 구경하고 선대의 유적을 답사하였다.
제17대 임금 효종 1(1650)년, 공(公)의 나이 56세 때에 “박학능문(博學能文)하며 그 뜻이 고상(其志高尙)하다”는 천거 명목으로 추천되어 정릉참봉(靖陵參奉)에 제수되자 이씨부인(李氏夫人)이 “선상국(先相國: 오리 이원익)께서 당신이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바라지 않았으나 굳이 말리지는 않겠다”고 하자 공께서 수긍하고 1개월만 근무하고 그만 두었다. 이후 조정에서는 공이 62세 되시던 해에 조지서별좌(造紙署別座), 공조정랑(工曹正郎), 용궁현감(龍宮縣監) 등에 제수(除授: 추천의 절차를 밟지 않고 임금이 직접 벼슬을 내리는 것)하였으나 나가지 않았고 다음 해에는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두 차례 제수되었지만 번번이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여 부득이 임금 앞에 나아가 사례하고 사퇴 상소와 함께 《군덕정폐소(君德政弊疏)》를 올린 다음 연천으로 돌아왔다.
1659년 65세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이 되어 군덕을 논하는 소(疏)를 효종에게 올리는 한편 당시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등이 주도하는 북벌정책에 신중할 것을 간하는 『옥궤명(玉几銘)』을 지어 올리고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했다. 그 해 효종이 돌아가시자 소를 올려 상례(喪禮: 상사에 관한 의례)를 논했고,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제18대 임금 현종(顯宗) 원년(1660)년에는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했고 다시 장령이 되었다. 그때 효종에 대한 “조대비[趙大妃: 인조의 계비(繼妃)]의 복상 기간이 잘못되었으므로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상소해 당시 조정의 실세인 노론(老論)측과 대립하며 정계에 큰 파문을 던졌다. 이를 『기해예송(己亥禮訟)』이라 한다. 당시 송시열 등 서인(西人)은 《경국대전》에 의거해 맏아들과 중자(衆子: 맏아들 이외의 모든 아들)의 구별 없이 조대비는 기년복(朞年服: 1년 동안 입는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건의해 그대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실은 의례(儀禮) 주소(註疏: 경서 등에 해석을 덧붙인 것)에 의거해 효종이 『체이부정(體而不正)』, 즉 “아들이기는 하지만 맏아들이 아닌 서자에 해당된다” 고 해석해 기년복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공(公)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고 또 종묘의 제사를 주재해 사실상 맏아들 노릇을 했으니 어머니의 맏아들에 대한 복(服)으로서 재최삼년(齊衰三年: 3년 동안 입는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복제논쟁의 시비로 정계가 소란해지자 왕은 공을 삼척부사(三陟府使) 외직으로 좌천시켰다. 공은 2년 간의 재임 동안 향약을 만들어 삼척 군민의 교화에 힘썼으며, 성씨, 풍속, 토산, 관할구역 등을 기록한 읍지인 《척주지(陟州誌: 척주는 삼척의 옛말)》를 편찬했다. 또한 《정체전중설(正體傳重說)》을 지어 삼년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였으며 병을 핑계로 삼척부사를 사직하고 연천으로 돌아왔다. 이후 80세에 이르기까지 10여 년 동안 《동사(東事)》를 완성하고 저술을 정리하며 벗과 제자들과 더불어 산수(山水)를 구경하면서 소견(消遣: 소일)하였다.
1674년 효종 비(妃) 인선왕후(仁宣王后)가 돌아가시자 조대비의 복제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조정에서는 대공복(大功服)으로 9개월을 정했으나 대구 유생 도신징(都愼徵)의 상소로 『기해복제』가 다시 거론되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맏아들, 중자의 구별 없이 부모는 아들을 위해 기년복을 입는다고 규정했으나, 며느리의 경우 맏며느리는 기년, 중자처는 대공으로 구별해 규정하였다. 그런데 인선왕후에게 대공복(大功服)을 적용함은 중자처(衆子妻)로 대우함이고, 따라서 효종을 중자로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근거는 《경국대전》이 아니라 고례(古禮: 옛날의 예법이나 예절)의 체이부정설(體而不正說)이었다. 이는 효종의 복제와 모순되는 것으로서 새로 즉위한 제19대 임금 숙종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이러한 일로 송시열 등 서인은 몰리게 되고 공의 견해가 받아들여져 대공복을 기년복으로 고치게 되었다.
당시의 『예송(禮訟)』은 국헌(國憲: 나라에 근본이 되는 법률 - 현재의 헌법)에 관한 문제로서 정권 및 임금의 체통(體統)에 관한 중대한 사안이었다. 공은 당대 『예(禮)』 이론의 일인자로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흉흉해진 민심으로 인해 약해진 국가의 근본 질서를 체계적으로 다시 확립하고자 했다. 즉, 왕권의 강화를 통해 왕조질서(王朝秩序)를 재확립하고 벌열세력(閥閱勢力: 나라에 공이 많고 벼슬 경력이 많은 세력)을 억제하며 일반 사대부(士大夫)에게 균등한 기회를 주고자 한 것이다. 공의 예론이 채택됨으로써 서인은 실각하고 남인의 집권과 더불어 공은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렸다. 숙종은 공을 많이 아껴 공에게 병이 나면 어의를 보내어 간호하게 하였다.
숙종 1(1675)년 이조참판, 비국당상(備局堂上), 귀후서제조(歸厚署提調) 등을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에 승진하고, 의정부우참찬 겸 성균관제주(議政府右參贊兼成均館祭酒)로 특진하였다. 한달 뒤에는 좌참찬(左參贊)으로 옮겨 경연에 입시하고 곧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옮겼다가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는데 한결같이 부임을 사양하였으나 윤허(허락)되지 않았다. 공(公)은 과거를 보지 않고 유일(遺逸)로서 벼슬이 삼공(三公: 삼공은 의정부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말함)에 올랐는데 타고난 학자적 체질로 행정 또는 정치 권력의 직접적 집행보다는 학자로서 또는 왕사(王師: 임금의 스승)의 입장에서 임금께 군주의 덕이나 정치 행정에 관한 의견을 올려 치도(治道: 다스리는 도리나 방법)가 바로 서게 하는데 주력했다.
그해 덕원(德源)에 유배중이던 송시열(宋時烈)에 대한 처벌문제를 놓고 공은 영의정 허적(積)의 의견에 맞서 가혹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남인은 송시열(宋時烈)의 처벌에 온건론을 주장하던 탁남(濁南)과 강경론을 주장하는 청남(淸南)으로 갈라졌고, 공은 청남의 영수가 되었다.
공은 또한 세종대왕의 큰 형님인 양녕대군의 사당 지덕사(至德祠)의 창건을 건의하고, 『체부(體府: 제찰사가 지방에 나가 일을 보던 관아)』,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범죄자의 색출과 세금징수, 부역 등을 위해 다섯 집을 한 통씩 묶던 호적제도)』, 『지패법(紙牌法: 종이로 만든 신분증명서)』, 『축성(築城: 성을 쌓는 일)』 등을 반대했다. 그해 임금으로부터 궤장(几杖)이 하사되었다. 이듬해 차자(箚子: 일정한 격식을 갖추지 않고 사실만을 간략히 적어 올리던 상소문)를 올려 『치병사(治兵事)』, 『조병거(造兵車)』 등의 시폐(時弊: 그 시대의 잘못된 폐단)를 논하였다. 한편 공은 숙종대왕에게 아무리 사임을 청해도 허락되지 않자, 성묘를 핑계로 고향인 연천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대비의 병환 소식을 듣고 다시 예궐하였다가 숙종의 특명으로 기로소당상(耆老所堂上)이 되었는데 음사(蔭仕: 과거를 거치지 않고 벼슬을 함)로서 기로소에 든 것은 특례였다.
1677년 비변사를 폐지하고 북벌준비를 위해 『체부』를 설치할 것과 재정보전책으로 『호포법(戶布法)』 실시를 주장하는 윤휴(尹鑴)에 맞서 그 폐(弊)를 논하고 반대하였다. 이듬해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했는데, 나라에서 집을 지어주는 특별한 예우를 베풀었다. 공께서 하사 받으신 집은 약 3,000평의 대지 위에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별묘(사당) 등으로 되어 있었으며 세칭 『은거당(恩居堂)』이라 불리워졌다.
숙종 5(1679)년 강화도에서 투서(投書)의 역변(逆變)이 일어나자 상경해 영의정 허적의 전횡을 맹렬히 비난하는 소를 올리자 임금이 노함에 죄를 청하고 연천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5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서인들이 반대파인 남인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던 사건)』으로 양사의 탄핵을 받아 관작이 삭출(削黜)되고 공의 유배를 청하는 상소가 여러 번 있었으나 숙종은 공의 심성을 잘 알기에 윤허하지 않아 참변을 모면하였다. 이후 공은 연천에서 저술과 후진양성에 전심하였다. 공은 이기론(理氣論)에 있어서 기(氣)는 이(理)에서 나오고 이(理)는 기(氣)에서 행하므로, 이(理)와 기(氣)를 분리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독특한 도해법(圖解法)으로 해설한 《심학도(心學圖)》와 《요순우전수심법도(堯舜禹傳授心法圖)》를 지어 후학들을 교육하였다. 숙종8(1682)년 4월 27일 연천 은거당에서 일생을 마치니 향년 88세였다.
돌아가신 지 6년 후인 1688년에 관작(官爵)이 회복되고 다음 해에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선영 건좌(乾坐)에 부인과 합장으로 장사지냈는데 숙종은 예장(禮葬: 예식을 갖추어 치 르는 장사)의 명령과 함께 제수(祭需: 제물)를 내리는 한편 제문을 짓고 승지를 보내 제사 지내도록 했으며 또 자손들을 등용하고 문집을 간행하도록 명하였다. 2년 뒤 1688년에는 사학유생(四學儒生)의 상소를 받아들여 마전(麻田: 경기도 연천 지역의 옛 이름)에 서원을 세우도록 한 후 “미강(嵋江)”이라 사액(賜額: 임금이 서원, 사당 등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리는 일)하니 이곳이 『미강서원(嵋江書院)』이다.
그 다음 해인 1689년에는 문순공(文純公)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선례에 따라 시장(諡狀)없이 “문정(文正)”의 시호를 바로 내렸으며 다음 해인 숙종 16(1690)년에 지방 유림의 공의가 있자, 특별히 명하여 전라남도 나주(羅州)에 사우(祠宇: 사당)를 세우고 위패를 모셨다. 숙종 19(1693)년 그곳에 “미천(眉泉)”이라 사액하고 예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니 이곳이 바로 『미천서원(眉泉書院)』이다. 뒤이어 사림(士林)들이 공의 학문과 덕을 기리기 위해 경상남도 의령에 『미연서원(嵋淵書院)』을 세워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문목공(文穆公)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주향(主享)으로 모신 경상남도 창원의 『회원서원(檜原書院)』과 삼척의 『경행서원(景行書院)』, 부여의 『도강영당(道江影堂)』 등에 배향(配享)하였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조선조 500년 동안에 참으로 대신(大臣)다운 대신이었다”고 평하면서 “선생은 권력에 조금도 아부하거나 연연함이 없이 오직 정의를 지키기에 힘썼고 또 마땅히 나아갈 때 나아가고 물러설 때 물러서서 진퇴의 본말을 분명히 했으며, 열심히 옛 것을 연구하여 그 진리를 깨우쳤으니 어지러울 때를 당해도 욕먹지 않고 절조를 지키며 명분을 살려서 명예에 손상을 입히지 않았다”고 공의 신도비문에 기록하였다. 신도비(神道碑)는 임금이나 종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문·무관의 무덤 동남쪽의 큰 길가에 세운 비로 살아 생전의 업적 등에 대한 내용을 적어 돌아가신 분을 기리는 비다.
공은 일생 동안 고학(古學)에 몰입하여 《육경(六經)》(75)을 근본으로 박학(博學)의 세계를 추구하여 우리 실학(實學) 발달의 단초가 되었다. 《기언(記言)》, 《경례유찬(經禮類纂)》등 방대한 저술(著述)로 위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기는 한편 서화에도 뛰어나 고전(古篆)에 바탕한 독창적인 전서(篆書)는 동방제일(東方第一)이라는 평과 더불어 숱한 일화를 낳았다. 삼척의 동해비(東海碑)에 새겨진 《동해송(東海頌)》과 《고문운율(古文韻律)》 등의 수고본(手稿本)은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묘소에는 공(公)께서 스스로 지으신 자비명(自碑銘)을 새긴 표석(表石: 무덤 앞에 세우는 푯돌)이 있고 신도비(神道碑)는 증조부인 동애공(東厓公)의 신도비와 나란히 은거당 묘역 입구, 길 옆에 세워져 있는데 공의 신도비명(碑銘)은 그를 사숙(직접 가르침은 받지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그 사람의 학문을 닦으며 본받음)한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찬했다. 이익(李瀷)이 지은 미수공의 신도비 내용은
자비명 (自碑銘)
미수(眉叟)의 이름은 허목이요 자는 문보(文父)다. 본은 공암 사람으로 한양의 동쪽 성곽 아래에서 살았다. 수(叟)는 눈썹이 길어 눈이 덮였으므로 스스로 미수라 하였다. 태어나서부터 손금이 문자(文字)의 형태로 되었으므로 또한 스스로의 자를 문보라 하였다.
미수는 평생 동안 고문(古文)을 지극히 좋아하였으며 일찍이 자봉산에 들어가 고문과 공씨전을 읽었다. 늦게야 문장을 성취하니 그 문장은 방사하였지만 난잡하지 않았다. 희활(稀闊:옛 것으로 희소한 것)함 을 좋아하여 스스로 즐기고 마음으로는 고인들이 남긴 교훈을 따라 항상 스스로를 지켜 몸에 허물을 적게하고자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그 스스로 명(銘)하노니 말은 그 행동을 가리지 못하며 행동은 그 말을 실천하지 못하였다. 다만 자족하여 성현의 글을 기꺼이 읽었으나 하나도 그 허물을 더는데 도움된 것이 없도다. 돌에 적어 뒷 사람을 경계(警戒)하노라.
미수공이 지은 시(詩) 한 편을 소개한다.
청뢰당 〔聽雷堂〕
숲 깊으니 초당은 조용도 하여 林深草堂靜
낮에도 사립문 열지 않네 巖扉晝不開
텅빈 뜰엔 낙엽만 쌓이고 落葉滿空庭
석등(石磴)엔 푸른이끼 돋아났구나. 石磴生綠苔
빗소리에 개울 소린 들리지 않고 山雨暗溪響
은은하게 우레만 들려오누나. 賺賺聽雲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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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천허씨 합천공파종사, 20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