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공파종회 역사

(2015년 발간된 앙천허씨 합천공파종사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합천공파 파조 17세 휘(諱) 훈(薰)

합천공파종회는 합천군수를 지내신 휘(諱) 훈(薰)을 파조로 모시고 있습니다.

11세 판도좌랑공 휘(諱) 관(冠) 후(後)

합천공은 판도좌랑공의 6세손 입니다.

합천공은?

합천공은 양양도호부사를 지내신 아버님 휘(諱) 비(扉)의 네 아드님 중 둘째 아드님 이십니다.

합천공과 공(公)의 형제 후손들은?

양천허씨가 조선시대에 배출한 정승 5분 모두 합천공과 공(公)의 형제 후손들에서 배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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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거당 묘역(잔디광장/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소재) 내에는 합천공을 비롯하여 은거당 종손가의 묘가 있습니다.

1. 합천공파종중(陜川公派宗中)의 탄생
합천공파는 합천공파종중이 결성되기 이전인 1990년까지 19세 양애공(陽厓公) 허적(磧)을 파조로 하는 양애공파와 19세 동애공(東厓公) 허자(磁)를 파조로 하는 동애공파 두 개의 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따라서 양애공파와 동애공파는 합천공 시제 행사를 제외한 모든 문중행사 일체를 각각 따로 진행했다. 양애공 허적은 17세 합천공 허훈(薰)의 큰 아드님인 허민(珉)의 외아들이고, 동애공 허자는 합천공의 작은 아드님인 허원(瑗)의 외아들이다.

1989년 가을, 동애공파는 우리 양천허씨 대동보(大同譜)인 《기해보(己亥譜-1959년 발행)》가 간행된지 30여 년이 지났는데도 남북관계를 비롯한 여타 사정으로 새로운 대동보 발간이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 않자, 종원들이 파보(派譜)라도 간행해 자손 관계를 보완하고 정리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논의를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양애공파와 동애공파 두 개 파로 분리되어 있던 합천공의 후손들이 합천공파로 통합하는 것에 의견을 모으고 1990년 봄, 충청남도 대전에서 『합천공파종중』 결성총회(結成總會)를 가졌다. 참석 종원들은 이 자리에서 문장(門長)에 우석공(又石公) 허혁(䓇-전 국회의원, 대종회 초대회장, 미수공 11대 종손), 회장에 석운(石雲) 허찬(燦-현 대종회 회장, 미수공 12대 종손), 총무에 허원호(元濠-현 대종회 고문, 송화공 10대손), 재무에 허석(錫-전 대종회 사무총장, 상호군 12대손)을 선임하여 『합천공파종중』이 정식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또한 이 총회 자리에서 《합천공파보(陜川公派譜)》를 간행하기로 의결했다.

그러나 『합천공파종중』이라는 명칭은 1990년 『합천공파종중』이 결성되기 이전인 1964년부터 문서 상에 등장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합천공 내외분의 묘소[임야(林野)-72,992m2(약 22,080평)]는 원래 경기도 의정부시 송산에 위치해 있었다. 이 묘소는 1910년부터 일제에 의해 시작된 ‘토지임야사정’ 당시 합천공의 종손(宗孫)인 양애공파의 허무(懋: 33세손) 명의로 등기되어 있었는데 허무(懋)가 1930년 도박으로 빚을 지고 서울 소재 천일약방(天一藥房)에 그 임야 전부를 넘겨주고 말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은거당(恩居堂) 11대 종손 허혁(䓇–당시 18세, 배제중학교 3년)이 천일약방을 찾아가 원금 및 이자 전액을 사재(私財: 개인 소유의 재산)로 배상하고 그 임야를 되찾았다. 당시 허혁(䓇)은 세월이 흘러도 합천공 묘소가 있는 임야는 어느 누구도 매각할 수 없도록 한다는 생각에 실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이름인 허중(中)으로 등기를 했는데 허중(中)은 ‘허씨종중(許氏宗中)’이라는 뜻으로 만든 가명(가짜이름)이었다.

이렇게 되찾은 경기도 의정부 송산 소재 합천공 내외분의 묘지 임야가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감에 따라 실존 인물이 아닌 허중(中)으로는 주민등록이나 인감증명을 발급 받을 수가 없어 임야의 보존과 관리에 애로가 많았다. 그러다가 1964년 10월 합천공 시제일(時祭日)에 제관들이 모여 실존 인물이 아닌 허중(中) 문제를 토론한 결과 허혁(䓇), 허백(𦯉), 허동욱(東旭), 허준(逡), 허권(權), 허찬(燦), 허웅(熊), 허극(極), 허준행(準行) 등이 합천공파종중을 구성하기로 하고 ‘은거당 12대 종손 허찬(燦)’을 대표로 하여 임야의 등기권자 명의를 허중(中)에서 ‘양천허씨 합천공파종중 대표 허찬(燦)’으로 변경한 것이 『합천공파종중』 이란 단어가 문서상에 처음 나타나게 된 것이다.

합천공파는 예하에 양애공파(陽厓公派), 학역재공파(學易齋公派), 관설공파(觀雪公派), 미수공파(眉叟公派), 송화공파(松禾公派), 영월공파(寧越公派), 숙천공파(肅川公派), 조산공파(朝散公派), 군수공파(郡守公派), 상호군파(上護軍派) 이렇게 10개의 소파로 구성되어 있다.

2. 합천공파보(陜川公派譜) 간행
1990년 충청남도 대전에서의 합천공파 총회 이후, 허원호(元濠)와 허석(錫) 두 분이 대전에 수단소(收單所)를 차리고 약 1년 동안 전국을 누비며 일가들을 찾아 독려한 끝에 1991년 8월, 현재 우리가 접하고 있는 《양천허씨 합천공파보(陜川公派譜)》가 세 권으로 간행되었다. 그 파보의 제호(題號)는 문장인 허혁(䓇) 공이 썼고, 서문(序文)은 회장인 허찬(燦)이 썼으며 발문(跋文)은 허원호(元濠)와 허석(錫) 파보 간행위원이 썼다. 합천공파보는 현존하는 양천허씨의 많은 파보 중, 편집 체제나 내용 면에서 제일 잘 되었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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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공파보 (1991년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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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공 묘소 (의정부 송산. 1967년)

3. 합천공 묘소 관리와 은거당(恩居堂) 묘역으로의 이장
1930년 은거당 종손 우석(又石) 허혁(䓇) 공(公)이 합천공 허훈(薰) 내외분의 묘역을 되찾은 이후, 경기도 의정부 송산 소재 합천공 묘역의 수호 및 관리 그리고 권리 행사는 1994년 연천 은거당 묘역으로 이장 할 때 까지 약 65년 동안 은거당 종손가(宗孫家)에서 도맡아 지속해 왔다.

은거당 종손가는 1930년도 이전에도 수백년간 대대로 합천공 묘역 수호 및 관리에 많은 도움을 주어 왔는데 이는 의정부 송산 합천공 묘역에 딸려있던 위토(位土)가 적었던 것에 기인한다. 수백 년 동안 대대로 이 묘역을 실제로 관리해 온 경주인(慶州人) 최씨는 은거당으로부터의 보조 없이는 묘역 수호 및 시제를 제대로 모실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최창기(崔昌基)씨 집안은 그의 8대조부터 수백 년간 합천공의 묘역을 관리해 온 집안이다.

1945년 대한민국이 일제 강점기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은거당은 소련군이 점령하고 있던 38선 이북 지역에 편입되어 사람들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은거당 종손가 또한 은거당의 재산 모두를 북에 남겨둔채 예전부터 사용하던 서울 소재 집으로 이전하여 생활을 하게되니 합천공 묘소 관리를 하고 있는 최씨에게 예전과 같이 많은 지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최씨네 살림 살이가 더욱 어려워져 시제를 차리는 것 또한 점점 힘들게 되었다.

이에 서울과 동두천(東豆川), 파주(坡州)에서 합천공 시제에 참여하기 위해 온 제관들이 시제 후 의정부 최씨 집에 모이면 이들 중 일부 몇몇 제관들은 호주머니 돈을 각출해 당시 묘지기인 최씨에게 전해 주곤 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어서 최씨는 묘역 관리의 어려운 사정을 은거당 종손가에 의지했고 종손가는 예전보다는 못하지만 최씨네를 지속적으로 보조해 주면서 의정부시 송산에 있는 합천공 묘소를 관리했다.

합천공의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신곡동 송산(松山), 효자봉 아래 북록(北麓: 북쪽 산기슭)에 공(公)은 축좌(丑坐), 배위(配位) 증 정경부인 고성이씨(固城李氏)는 백호강(白虎崗: 앞쪽 호랑이 형상의 언덕) 진좌(辰坐)에 있었다. 그런데 의정부시 신곡동 일대가 1995년경부터 개발되는 관계로 합천공 내외분의 묘소를 그 이전에 다른 곳으로 이장해야만 했다. 합천공 후손들은 합천공께서 새로이 쉬실 곳을 찾으려 했으나, 재원이 없던 관계로 그 마저 여의치 않았다. 이런 사정을 알고 있던 은거당 종손가가 합천공 내외분을 연천 은거당 묘역으로 이장 모시자는 제안을 하니, 합천공파 이사진 모두 만장일치로 은거당 종손가의 이러한 제안에 크게 감사하며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합천공 내외분의 묘소는 1994년 경기도 연천 은거당 묘역으로 이장을 했는데 합천공께서 모셔진 자리는 은거당 묘역 중 제일 좋은 자리로 수백년간 묘를 쓰지 못하게 비워 두었던 귀한 자리다. 은거당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합천공의 손자, 동애공 허자(磁, 좌찬성: 현재의 부총리급)의 묏자리를 현 위치보다 좀 더 높은 위쪽(현재의 합천공 묘소 위치)에 쓰려 했는데 그곳은 왕기(王氣: 왕의 기운)가 서린다 하여 쓰지 못하고 조금 아래인 지금의 위치에 썼다고 한다. 따라서 동애공의 묘 위쪽의 좋은 자리는 왕기가 서리고 있는 귀한 자리라 하여 지난 500여 년 동안 아무도 이곳에 묘를 쓰지 못하게 했었다. 그런데 동애공의 할아버님이 되시는 합천공이 은거당에서 소중하게 간직해 온 이 명당 자리로 오시게 되니 아마도 이 묏자리는 합천공을 모시기 위해 남겨둔 자리가 아니였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은거당 종손가는 말하고 있다. 그 옛날 어느 유명한 스님이 현재의 합천공 묘소 위치를 임금의 옥좌(임금이 앉는 자리)에, 좌우로 길게 뻗은 앞쪽 능선은 임금을 중심으로 도열해 있는 좌·우 문무백관들로 비유했다 한다. 실제 합천공 묘소에 올라 탁 트인 앞쪽을 바라보자면 은거당에 수백 년 간 전해내려 온 그 이야기가 허황된 말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합천공과 공의 배위 이장시 의정부 송산에서 출토된 거대한 석관은 현재 은거당 묘역 잔디 광장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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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공 묘소 오르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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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거당의 옛 모습 (소치 허련)
4. 합천공파의 성지(聖地) 은거당 묘역
은거당 묘역은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서울 중심부에서 약 80km,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현재 북한 지역)으로부터는 약 40km 떨어져 있으며 위도(緯度) 38도 선이 지나가는 한탄강 선사유적지에서 약 10km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6.25 한국전쟁 이전까지는 이곳이 북한지역이었으나, 전쟁을 통해 현재는 대한민국에 편입되어 있다. 이곳에서의 전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동애공과 미수공 등 이곳에 잠들어 계신 조상님들의 묘 주변 석물에는 많은 수의 총탄 자국을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6.25 한국전쟁 전까지 잘 보전되어 오던 은거당(숙종대왕이 미수공의 노년의 삶을 위해 지어준 집)이 전쟁 중에 모두 소실되어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는 것이다.

은거당 종손가 묘역은 원래 17세 합천공 허훈(薰)의 둘째 아드님인 18세 의영고령 허원(瑗: 고령공)을 위시하여, 고령공(庫令公)의 큰 아드님 19세 좌찬성 허자(磁: 동애공), 동애공(東厓公)의 큰 아드님 20세 서호처사 허강(橿: 송호공) 송호공(松湖公)의 셋째 아드님 21세 포천현감 허교(喬: 포천공), 포천공(抱川公)의 큰 아드님 22세 우의정 허목(穆: 미수공)을 비롯하여 미수공 종손가 후손과 배위들이 잠들어 계신 곳으로 지난 1994년 합천공께서 경기도 의정부로부터 이곳으로 이장오시기 전까지 이 묘역에서 제일 윗 어른은 18세 고령공이었다.

이곳 묘역으로 이장 오신 또 한 분이 계신데 미수공의 둘째 동생 영월공(寧越公) 허서(舒)이다. 영월공의 묘소는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장덕리에 계셨는데 그곳이 습할뿐 아니라 주위에 후손들이 살고 있지 않아 묘소 관리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은거당 12대 종손 허찬(燦)은 1992년 봄, 영월공 허서(舒)의 묘소를 은거당 묘역으로 이장하는 것에 쾌히 동의하여 영월공의 묘소 또한 은거당 묘역 내에 자리하게 되었다. 영월공 묘소의 위치는 공(公)의 아버님이자 미수공의 아버님인 포천공 허교(喬) 묘소 옆이다.

한편 은거당 묘역 산 너머에는 합천공의 큰 아드님인 18세 허민(珉)을 위시하여 그 자손인 양애공파의 선조 묘역이 조성되어 있어 합천공께서 이곳 묘역으로 오신 이후 이곳 일대는 명실공히 우리 합천공파의 성지가 되었다. 그러나 양애공파 선조 묘역은 은거당 묘역보다 휴전선과 더 가깝게 위치해 있어 묘역 관리에 항상 어려움이 따랐는데 지난 2007년 충청북도 청주 석실리의 양애공파 후손들이 『양애공파 세장묘역』을 새로이 조성함에 따라 합천공의 큰 아드님인 허민(珉)을 위시하여 이곳에 계시던 양애공파 선조 모두를 그곳으로 이장해 지금은 이 일대에 은거당 묘역만 남아있다.

은거당과 은거당 묘역이 있는 이 지역은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나뉘어지기 전까지 면 사무소가 있던 마을로 5일 장이 섰으며 파출소, 우체국, 초등학교가 있었던 면의 중심지였다. 더우기 개성으로 오가던 버스가 임진강 나루에서 뗏목으로 건너 오가며 정차하던 중요한 지역이었다. 양애공파 선조와 미수공파 선조들이 건넜던 그 나루는 징파나루 또는 미수나루라 불리우는데 지금은 그 나루터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대신 임진강을 가로지르는 교량이 건설되어 있다.

은거당 종손가가 지난 500여 년간 옛 모습 그대로 원형을 유지하며 관리 수호해 온 은거당 묘역의 미수공 허목(穆) 묘소 일대는 지난 2002년 9월 『미수 허목 묘역』이라는 명칭으로 『경기도 기념물 제184호』로 지정되었다.

합천공을 위시하여 하계 선조들에 대한 시제는 매해 10월 넷째 토요일(양력)에 이곳 은거당 묘역(미수 허목 묘역)에서 약 300여분의 제관들이 모인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