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Portrait
양천허씨 22세 /  조선시대
허목(穆)

파조명허목(穆)

행직:  우의정(右議政) / (국무총리)

Image Description

미수공과 미수공의 아버님인 포천공의 영정 모습들 (수원박물관)

Image Description

포천공 묘에서 바라본 미수공 묘의 모습.

미수공파(眉叟公派) 약사

미수공파는 송호공 허강(橿)의 셋째 아들인 포천현감 허교(喬: 포천공)의 첫째 아들로 벼슬이 우의정에 이른 22세 미수 허목(穆: 미수공)을 파조로 모시고 있는 문중입니다. 성격이 강직하셨던 미수공은 사학 중 하나인 동학의 재임(반장)시절 재임의 권한으로 임금에게 아첨한 유생을 명부에서 제적시킨 사건으로 일정기간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는 벌을 받았습니다. 물론 임금에게 아첨하던 그 유생이 이 내용을 임금에게 알리면서 자신은 억울하다고 말했기에 미수공이 이런 벌을 받게된 것입니다. (유생이 명부에서 제적되면 그 유생은 과거를 볼 수 없게 되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몇 년 후 미수공은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다시 취득했으나, 과거에 뜻을 접고 학문에만 정진한 결과 대학자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늦은 나이인 56세 때 "박학능문"이라는 명목으로 천거되어 벼슬길이 열렸으나 미수공은 임금이 내리는 벼슬을 사양했습니다. 이러한 사양에도 불구하고 어명으로 벼슬이 내려지면 잠시 나갔다가 곧 사양 상소를 올리고 다시 물러나기를 반복했습니다. 조선 제19대 임금 숙종은 이러한 미수공의 지식과 혜안을 특히 사랑하여 어명으로 미수공을 우의정까지 오르게 만들었고, 또 조선조 500년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과거를 보지 않은 미수공을 기로소에 들게 했습니다. (기로소는 과거에 합격하여 정2품(판서) 이상의 고위직을 지낸 문신이 70세가 넘어 임금과 함께 친목 등을 다지는 기관입니다.) 또한 세종대왕 때 영의정을 지낸 황희 정승, 선조, 광해군, 인조 조에 영의정을 지낸 이원익 정승과 함께 조선조 500년 동안 임금으로부터 집을 하사 받은 세 분 중의 한 분이십니다. 미수공은 이 집을 "수고은거"(늙은 신하가 임금의 은혜로서 산다.)라는 집 이름을 지었으나, 세인들은 이 집을 은거당이라 불렀고, 약 2,900여평에 이르는 은거당은 수백년간 미수공의 종손계를 지칭하는 단어로 자리 매김하였습니다.

미수공의 전서체는 중국의 전서체와 자못 다른 서체로 동방제일의 전서체라 일컬어지며 미수체라고도 불리웁니다. 미수공이 삼척부사 재직 시 바다의 해일을 다스리기 위해 전서체로 쓴 동해비는 강원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 외에도 많은 서책과 각종 유물들이 은거당 종손가에 전해 내려왔는데, 해방 후, 은거당이 북쪽에 편입되었고, 또 6.25 한국전쟁으로 은거당이 모두 소실되면서 전해지던 모든 유물들이 유실되었습니다. 은거당 종손가가 소장하고 있던 일부 유물들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었습니다. 미수공의 서책 중 하나인 "기언"은 민족문화추진회가 총8권으로 한글 번역을 하였습니다.

미수공의 후손들은 종손가를 중심으로 미수공의 둘째 아들인 안혁공 후손 일부가 6.25 한국전쟁 전까지 경기도 연천에서 살았으며, 하계로 내려오면서 충청북도 영동과 청주, 충청남도 논산, 경기도 파주 방축동 등 여러 지역에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습니다.


모토: 미수공파종회 모토

  • 회장

    허원무(元茂)
    연락처: -

  • 총무

    허욱(煜)
    연락처: -

  • 집성촌

    경기도 연천, 충북 영동,청주, 충남 논산, 경기도 파주 방축동

  • 수상내역

    관련 정보가 없습니다.


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