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공파종회는 합천군수를 지내신 17세 합천공(陜川公) 휘(諱) 훈(薰)을 파조로 모시고 있는 종회이며, 양천허씨 판도좌랑공파(版圖佐郞公派) 하계의 10개 중파(中派) 중 하나입니다.
합천공파종회는 10개의 소파를 거느리고 있으며, 1997년 33세 우석(又石) 휘(諱) 혁(䓇) 공이 쾌척한 약 35억원의 재원을 바탕으로 종중회관 장만 및 하계 10개 소파 묘역 정화사업 지원을 했으며, 현재 합천공파(은거당) 시제봉행,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소재 은거당 묘역 정화사업, 미수문화제 지원사업 등 합천공파 문중과 관련된 각종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합천공은 계보로 볼 때, 11세 판도좌랑공 휘(諱) 관(冠)의 장손계로 내려오다 17세로 태어난 네 명의 형제 중 둘째입니다. 공(公)의 형님인 재령공 휘(諱) 손(蓀)은 두 아들이 우의정과 좌의정 정승을 지낸 관계로 형님의 아드님 대(代)인 18세 때 분파를 하였고, 첫째 동생인 영월공 휘(諱) 지(芝)는 영월공파로, 둘째 동생인 전부공 휘(諱) 형(蘅)은 전부공파로 각각 분파했습니다.
합천공께서 거주하시던 곳은 현재 전해지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지 못하나 합천공파의 성역인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일대에 거주하신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이유로 합천공과 배위 고성이씨(固城李氏)의 묘가 경기도 의정부시 송산(松山)에 조성되어 있어 아마도 서울(당시 한양)애 거주하지 않으셨나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 봅니다. 그라나 합천공의 두 아들인 천석당(泉石堂) 휘(諱) 민(珉)과 휘(諱) 원(瑗)부터는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일대에 묘를 조성했습니다. 그곳에는 현재까지도 18세 휘(諱) 원(瑗)을 위시하여 우의정을 지낸 22세 미수(眉叟) 휘(諱) 목(穆)의 종손계가 묘역을 조성하며 선조들의 묘를 수호해 오고 있습니다. 이곳은 예전부터 ‘은거당 묘역’으로 불리워져 왔으나, 미수공의 묘소 및 이 일대가 경기도 기념물 제184호로 지정되면서 ‘미수허목묘역’이라고도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에 함께 묘를 조성하며 이웃하고 살았던 합천공의 다른 후손들은 병자호란과 임진왜란 등을 거치면서 왕징면이 아닌 타지에서 다시 뿌리를 내리게 되는 등, 여러 사정으로 인해 많은 수의 묘들이 현재 다른 곳으로 이장되었습니다.
합천공의 많은 후손들은 조선시대 중앙 정계와 산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 후손들 중 몇 분을 보면, 19세 동애공(東厓公)은 현재의 부총리 격인 좌찬성을 지냈으며, 대학자로 학문이 높았던 22세 미수공(眉叟公)은 현재의 국무총리 격인 우의정을, 미수공의 사촌 형으로 나라에서 내리는 많은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학문을 사랑했던 관설공(觀雪公) 휘(諱) 후(厚), 언론 담당부서의 수장인 대사간을 지낸 29세 허전(雋), 나라에서 제수하는 벼슬을 마다하고 ‘은당강회’를 열어 유림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31세 휘(諱) 헌(憲) 등이 있습니다.
따님들 또한 많은 명문가의 며느리가 되었으나, 우리 합천공 후손들의 며느리 또한 조선 제4대 임금인 세종대왕의 큰 형님인 양녕대군의 증손녀, 학문이 높았던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따님, 영의정을 여러 번 지냈으나, 청렴했던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의 손녀, 영의정을 지낸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의 손녀 등 많은 명문가 집안의 따님들이 계십니다.
대한민국은 물론,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합천공 후손 모두는 자랑스러운 선조들이 물려주신 얼을 되새기며 명문벌족의 후예답게 맡은 임무에 항상 최선을 다 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합천공 후손은 한 분도 빠짐없디 합천공파파보(족보)에 등재를 해 주시기 바라며 항상 댁내 조상님의 음덕과 행운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