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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허씨 22세 /  조선시대
허의(懿)

파조명허의(懿)

행직:  송화현감(松禾縣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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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의령 소재 미연서원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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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양재 재실 모습 (경남 사천시 배춘리 소재)

송화공파(松禾公派) 약사

송화공파는 21세 포천현감 허교(喬)의 둘째 아들이자 미수공 허목(穆)의 첫째 동생인 송화군수(松禾郡守) 허의(懿: 송화공)를 파조로 모시는 문중입니다.

송화공은 서울에 사시다가 제16대 임금 인조 14(1636)년 병자호란을 당하여 어머님인 나주임씨(羅州林氏)를 모시고 처가 댁이 있는 경상남도 의령 지방으로 내려갔습니다. 배위인 사천이씨(泗川李氏)는 구암(龜巖) 이정(李楨)의 현손녀로 사천, 의령 지방에 친정집 전장(田莊: 개인소유의 논과 밭)이 있어서 송화공께서는 처가댁을 의지해 영남 지방으로 내려가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기록에는 처음 사천 지방으로 가셨다가 훗날 의령으로 이거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난이 끝나고 나서도 형제들과 가까운 친척들이 있는 연천으로 돌아오시지 않고 계속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니 자손들이 의령을 중심으로 번성하고 세거하게 됩니다. 그런데 송화공과 미수공이 피난시에 잡으신 터를 모의촌(慕義村)이라 하는데 우리 허씨가 그곳에 터를 잡기 전에는 그 골짜기의 명칭이 모아(毛兒)였다고 합니다.

의령, 창녕, 고령, 거창 등은 미수공을 비롯하여, 동생인 송화공, 영월공, 조산공 등과 많은 관련이 있습니다. 첫째 이 분들의 아버님인 포천공(抱川公) 허교(喬)가 일곱 고을을 두루 역임한 지방관이였던 관계로 경기도 양성(陽城: 현 안성시 일원), 경상북도 고령(高靈), 경상남도 사천(泗川), 칠원(漆原: 현 함안, 의령 일원), 거창(居昌) 등지로 그 처소를 옮기며 사셨습니다. 둘째 경상남도 창원의 별서(별장)는 미수공의 고조(高祖)인 고령공 허원(瑗)의 장인 선산인(善山人) 김수온(金粹溫)의 집과 전답이 있던 곳인데, 집안에 대(代)를 이어갈 자손이 없자, 공의 따님이자 고령공의 배위가 당신의 아드님인 동애공 허자와 손자인 허강에게 외손으로서 봉사(奉祀)를 해 달라며 당신 집안의 집과 토지를 물려 주었고 관리가 부실했던 이 별서를 포천공과 미수공이 다시 수리하여 오랫동안 별서로 사용했습니다.

또 송화공의 처가댁인 구암 이정(李楨) 댁도 장인인 이대일(李大一) 대(代)에 와서 손이 끊기게 됩니다. 그래서 송화공의 배위인 사천 이씨는 양자인 허충(翀)에게 친정집의 봉제사를 부탁하고 49세에 돌아 가시니, 그 댁 봉제사 또한 우리 허씨 집안에서 받들게 됩니다. 양자 허충(翀)은 미수공의 둘째 동생이며 송화공의 동생인 영월공 허서(舒)의 둘째 아드님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그 댁의 논과 밭 등을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창원과 사천, 칠원 지방에 전답을 포함한 별서로 인해 송화공은 그곳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미수공 또한 그곳에서 십여 년을 지내시며 영남의 유림과 교류하면서 제자들을 키우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의령(모의촌)에는 미수공께서 송화공과 함께 지내실 때 손수 심은 은행나무들이 현재 거목으로 자라나 있으며 이 나무들은 1982년 11월 보호수로 지정되었습니다. 송화공의 후손들은 경상남도 의령, 사천, 창녕과 충청남도 대전에 많이 살고 있습니다.


모토: 송화공파종회 모토

  • 회장

    허욱(煜)
    연락처: -

  • 총무

    허욱(煜)
    연락처: -

  • 집성촌

    경상남도 의령, 사천

  • 수상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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